뭔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고, 불만일 때가 있다. 그 사항을 누구에게 개선 요청할 때는 정당한 방법,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논점을 흐려서는 안 된다. 그래야 낚이지 않는다. 이 내용은 물건을 살 때, 서비스를 요청할 때처럼 일상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내용이다.
주말에 동덕여대 남녀공학사태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직장 사원과의 대화에서…
동덕여대 사태에 앞서, 먼저 내가 관리자였을 때 현장 한 직원과의 일화를 통해 느낀 바가 있어 올려본다.
평화로웠던 어느 날, 그 직원과 점심 식사를 한 후 같이 얘기하는데, 어찌나 불평 불만이 많은지 밑도 끝도 없이 계속 투덜대는 게 아닌가. 나는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고, 옆에서 듣고 있으려니 내가 다 짜증이 났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얼굴은 여전히 벌겋게 상기된 채로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K씨! 도대체 뭐가 문제에요?”
“내 말 좀 들어봐요! 어쩌구 저쩌구~ 궁시렁 궁시렁~…”
“아~ 그런 거 때문이에요? 딴 사람도 다 마찬가지에요. 본인만 그런 것도 아니고, 회사가 어떻게 직원들의 입맛을 다 맞춰줄 수 있겠어요?”
“그렇긴 하지요.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고, 그건 어떻게 생각해요? 궁시렁 궁시렁~”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인데, 저는 그다지 크게 신경 안 써요.”
자기 말에 공감을 안 해주니, 약간 삐친 듯 실망스러운 표정을 보이며 K씨는 여전히 브레이크를 잡지 못하고 아주 자질구레한 것까지 불평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평소에는 별로 내색 하지 않던 작은 일까지 시시콜콜 얘기하길래 나는 도대체 왜 그럴까 싶었다. 이 대화로 그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나는 생각했다.
‘어디서 얘기는 못하고 마음 속에 많이 쌓여 있었구나…’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거 같았는데… 일이 힘들어서 그런가.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물론 그의 말 중에는 어느 정도 타당한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을 볼 때 어느 회사든 직원 모두가 100% 만족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느 데도 없는 것처럼, 현실과의 적절한 타협은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그 때 우리 회사가 그가 얘기하는 정도의 악덕 기업도 아니고, 급여 수준과 복지,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코스닥 업체였다. 비판을 하고 불평을 하더라도 이성적으로, 논리 정연하게 남들이 수긍할 만한 수준에서 얘기해야 공감을 받을 수 있는데, 흥분한 채로 주저리 주저리만 하고 있었으므로, 그 심정은 안타까워 보였지만 나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고, 도리어 멀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동덕여대 사태도 마찬가지다. 학교 측의 남녀공학전환 논의에 대해 몰랐던 학생들이 시위하는 자체는 이해할 수 있지만 지금의 이런 무절제하고 난폭한 모습에는 공감할 수 없다.
돌아가서, 결국 K씨의 가장 큰 불만은,
“하는 일은 많이 하고, 월급은 적다!”
였다. 내가 볼 때는 일이 많은 건 괜찮은데, 그 만큼 월급을 더 받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이 하나의 주된 이유로 모든 것을 삐뚤게 보고 있었다. 자신이 맡은 업무, 식당밥, 출·퇴근 시간, 통근 버스, 기숙사, 주변 동료들, 팀장, 사장, 회사 이름까지도 말이다.
당시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번 동덕여태 사태와 같이 돌이켜보니 느끼는 바가 컸다. 그 사람을 나무랄 필요 없다. 예전의 내 모습, 아니 지금의 내 모습 같기도 했다. 그런 태도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고,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 나의 정신 건강만 나빠지는 것이다. 나에게 울분을 토하던 그 직원은 스스로 좀 뜨끔했는지 그날 이후에는 자중했다. 월급은 오르지 않았고, 맡은 업무도 변하지 않았다.
동덕여대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봉기를 일으킨 주된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간 학교의 처우와 학생들과의 소통 불능이 남녀공학전환 문제로 터져버린 것이지만, 요청 사항을 정당한 방법으로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리기보다는 논점을 흐리면서 오로지 불만스러운 감정의 과도한 표출에만 집중, 브레이크 없는 폭주로 방향성을 잃고 동기는 변질되고 말았다. 내 눈에 들어온 건 그들의 정당한 외침보다는 다음의 모습들 뿐이다.
존경스러운 교수 감금, 폭언
아름다운 건물 점거 후 독차지
생전 처음 보는 비상식적이고 이해되지 않는 투표 모습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운 휘황찬란한 락카칠
명예로운 설립자 동상 훼손
근면 성실한 수업 참가자, 시위 비참여자 인신 공격
학생 장래를 위한 취업박람회장 파손
‘저건 너무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정도는 지켰어야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이성이 돌아올텐데, 그 때는 어쩌려고…’
여론의 공감 확보가 되지 않는 한 그들 편은 없을 것이고 결국 고립된 채로 스스로 낚일 수밖에 없다. 더 이상의 피해 없이 지혜롭게 해결되기를 바라지만, 이미 출혈이 발생한 부분의 해결에 있어서, 그래도 우리가 아직 법치국가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
낚이지 않는 법
이처럼 자신이 요구하는 것,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정당한 방법과 절차로 명확하게 말하지 않으면 낚이게 되어 있다. 즉, 자신의 목적을 잃고 상대방의 페이스에 말려든다는 얘기다. 위의 K직원 경우는 비록 낚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열변을 토한 대 반해 아무 소득 없이 본인 정신 건강에 해만 끼친 꼴이 되었다.
자신의 업무 대비 급여를 얼마나 받으면 좋겠는지, 그리고 왜 높아져야 하는지 등 구체적으로, 공식적으로 상관에게 말했더라면, 나에게 불평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직장에서 급여를 높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므로, 그래도 업무는 줄였을 가능성이 높다.
가정, 학교, 직장, 각종 모임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일을 많이 겪는다. 물건을 살 때, 음식 메뉴를 시킬 때, 각종 금융 상품에 가입할 때, 부모님께 요청할 때, 혹은 소개팅 같은 사람과의 만남에서, 여러 선택을 결정하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리고 더 문제는 그것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낚이지 않으려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원하는 것을 정당한 방법으로 명확하게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 낭비가 되고, 역으로 상대방에게 낚이기 마련이다. 보험, 자동차 구입 같은 경우가 아주 좋은 예가 된다. 성과를 잘 내거나, 실속을 잘 챙기는 사람은 원하는 것을 명확히 함으로써 불필요한 것에 낚이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온라인에서 점퍼를 하나 샀다. 처음에는 모직 코트나 하나 살까 하다가 이것저것 보다 보니 어느 새 원하지 않던 이중 점퍼를 사게 되었다. 그것까지는 괜찮았지만, 실제 물건을 받아보니 사이즈도 안 맞고 쇼핑몰에서 보던 것과는 심한 차이가 있었다. 원래 사려고 했던 것을 제껴두고 산 제품인데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으니 후회막급이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확실하게 정했어야지!’
맞다. 어느 가격대에 어떤 종류의 제품을 사겠다고 확실히 정했으면 광고나 이벤트에 휘둘리지 않고 원하는 물품을 사게 되었을 것이다. 비록 나중에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크게 후회는 하지 않게 된다.
‘그래도 처음부터 내가 원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만약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별로 필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정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이었다면 그것에 대한 이미지가 확실하게 떠오른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점퍼 구입 뿐 아니라, 지금껏 내가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명확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낚인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가?
소개팅 같은 사람과의 만남을 얘기해 보자. 이 역시 물건을 사는 것, 보험 같은 금융상품에 가입하는 것처럼 낚일 수 있는 건 매한가지다. 소개팅, 중매와 같은 중계를 통한 이성과의 만남은 특히 그 목적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결혼 상대자인지, 애인인지, 아니면 친구인지를. 나는 결혼 상대를 만나는 목적으로 나갔는데, 상대방은 전혀 그럴 의향이 아니었다면 서로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다.
가까운 부부, 부모-자식 간에도 ‘이렇게 얘기하면 잘 알겠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예의를 지켜 원하는 바가 있다면 명확하게 말해야 쓸데없는 논쟁을 피할 수 있다.
어떤 일을 추진함에 있어 확실한 목적, 뚜렷한 이미지와 정당성을 가져야 주관이 흔들리지 않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다.
위대한 이들을 목적을 갖고, 그 외의 사람들은 소원을 갖는다.
– 워싱턴 어빙 –